Archive for June, 2010

리코 카플리오 RR120 Ricoh Caplio RR120

(한일 월드컵이 있었던 해네요.) 2002년, 한창 2백만 화소급의 보급형 디지털 카메라가 (이하 디카) 시장에 풀리고 있었습니다. 누리집 만들기가 열풍이었고 (제가 미로네를 연 것도 같은 해입니다.) 이는 디카 보급과 맞물려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어서 누리집에 올리는 계기가 됩니다. 그리고 누리집을 막 만든 저도 대세를 따라 디카를 사기로 했죠.

그때 전 휴대하기가 쉽고 깔끔한 모양새와 돌아가는 렌즈 등으로 당시에 많은 인기를 끌었던 Nikon Coolpix 2500을 구입하기로 결정하고 강변 테크노마트에 갔습니다.

Nikon Coolpix 2500

Nikon Coolpix 2500

그런데 테크노마트는 참 신비로운 곳입니다. 테크노마트를 나와서 정신을 차려보니 Coolpix 2500을 사러 갔던 제 손에는 이런 녀석이 들려 있었습니다.

Ricoh Caplio RR120

Ricoh Caplio RR120

저는 왜 뜬금없이 Ricoh Caplio RR120을 샀을까요? 제가 매장에서 Coolpix 2500을 찾자 그거보다 더 좋은 물건이 있다면서 판매상이 보여준 것이 바로 RR120이었습니다. 저는 제조사가 생소한데다가 투박하게 생긴 RR120을 보고 고개를 저었습니다만 이 판매상은 포기하지 않고 직접 사진을 찍어서 제게 보여줬는데 그 사진이 어찌나 선명하던지…. (그 판매상은 디카 초짜를 한 눈에 알아보고 이윤이 많이 남는 모델을 팔려는 심산이었지만.) 덕분에 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지금까지 듣도 보도 못한 RR120이라는 디카를 사진 한 장과 판매상의 말만 믿고 덜컥 사게 됐습니다.

생애 첫 디카, RR120과 저는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됐습니다. (저는 필름 사진기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까 생애 첫 사진기라는 표현이 좀 더 정확하겠군요.) 하지만 첫 디카가 생겼다는 두근거림은 그다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RR120은 AA 건전지 4알을 필요로 했는데 고가의 2000mAh 건전지를 써도 사용시간이 채 30분을 넘기기가 힘들었습니다. 게다가 건전지를 갈 때마다 날짜와 시간을 다시 맞춰줘야 했죠. 이게 꽤 귀찮아서 나중에는 그냥 시간도 안 맞추고 쓰게 되더군요. 덕분에 RR120으로 촬영한 사진들은 언제 찍었는지 모를 사진들이 좀 있습니다. (그나마도 지금까지 보관하고 있는 사진은 300여장 남짓이네요.)

이런 실망스러운 전력 소모율을 가진 RR120을 제가 계속 쓴 이유는 단 하나, 매장에서 처음 본 순간부터 저를 사로잡은 선명한 화질 때문이었습니다.

RR120으로 찍은 사진 중에 몇 장을 추려서 올려봅니다. 참고로 이 사진들은 자동으로 설정한 상태에서 찍었으며 아무런 후보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촬영 장소는 제14회 (혹은 15회. 지금은 알 길이 없네요.) 여주 도자기 박람회장입니다. 처음 3장은 차양막이 설치된 실외에서, 나중 2장은 실내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사진을 클릭하면 원본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제 눈에는 요즘 쓰이는 보급형 디카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인데 여러분 생각은 어떠신지.

결론적으로 RR120은 전력 소모율을 제외하면 썩 괜찮은 디카였습니다. 제조사가 국내에서 그다지 인지도 있는 회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동급 타사 기종에 비해서 가격이 저렴했던 것도 장점이었죠. (이 점이 제가 두번째 디카를 고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 여담이지만 기술외적인 불만이 하나 있었는데 제조사 인지도가 떨어지는 덕분에 아래와 같은 상황이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카메라 어디 거에요?

미: (웃, 또 물어본다.) 리코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니콘요?

미: 아뇨. 리코…. 왜 그, 신도리코라고 복사기 파는 회사 있죠? 그게 리코라는 일본 회사 제품을 신도전자라는 곳에서 수입해다가 파는 거거든요. 아남니콘이나 롯데캐논 같이.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위와 같은 상황이 여러번 발생했습니다. 제조사의 사정 설명을 소비자가 해줘야 하는 판이라니….

RR120은 제 첫 디카이자 많은 추억을 기록하게 해 준 고마운 녀석입니다. 저장장치가 마치 예전에 쓰던 플로피 디스켓마냥 부실해서 많은 추억을 잃기도 했지만요. 본가에 있는 제 방 어딘가에는 아직 RR120이 잠들어 있습니다. 언젠가 한번 꺼내서 사진 몇 장 찍어봐야겠네요.

편집증과 강박장애

저는 전부터 스스로 약간의 편집증이 있다고 생각해서 지금까지 자신을 Paranoid라고 표현했습니다.

제 증상을 예를 들면 만화나 드라마 등을 볼 때는 반드시 완결이 난 것을 봐야하고 또한 1화부터 봐야 한다거나 하는 겁니다. (유리가면에 손을 대고 얼마나 후회했던지.) 만약에 연재나 방영이 중단되면 제게는 정말 고통이죠.

또한, 제가 티스토리나 네이버 블로그 같은 것을 쓰지 않는 이유는 제 블로그를 제가 마음대로 관리할 수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데이터 백업이라던지, 기능이라던지) 그래서 제로보드를 시작으로 테터툴즈(텍스트큐브)로 넘어갔고 지금은 워드프레스를 쓰고 있지만 한 때는 진지하게 블로깅 툴 자체제작까지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귀찮음이 저를 막아서더군요.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밖에도 제게는 지켜야 할 어처구니 없는 몇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완벽한 번역이란 (제 개인적인 생각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떤 것을 이해하고 상황에 몰입하려면 반드시 번역본이 아닌, 원어로 된 것이어야 합니다.

쉽게 말하면 게임을 할 때는 반드시 그 게임의 제작사가 사용하는 언어로 발매된 게임을 해야합니다. 한국에서 개발된 게임은 한글판으로, 미국에서 개발된 게임은 영문판으로 해야하고 당연히 일본에서 개발된 게임은 일본어판으로 해야하죠. 그런데 슈퍼 마리오 만큼은 (어이없게도) 영문판으로 해야합니다.

또한, 어떤 영상물을 볼 때 자막을 봐서는 안 됩니다. 제가 아는 언어는 모국어인 한국어, 그리고 약간의 영어와 일본어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 외의 모르는 언어로 된 영상을 볼 때도 이해를 못 할 망정 자막은 안 봅니다. 재미있는 것은 자막을 안 보는 것이 제작자나 등장인물이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을 (최소한 제가 생각하기에) 더 잘 전달하더군요. 자막은 오히려 신경을 분산시킬 뿐, 영상에 집중할 수가 없게 만듭니다. 이 점은 많은 분들이 공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공감이 안 되시나요? 그러니까, 좀 더 극단적이고 저질적인 예를 들면 외국 야동을 볼 때 자막을 보는 사람이 많을까요 안 보는 사람이 많을까요?)

각설하고, 저는 이런 가벼운 증상들이 편집증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했는데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J에 따르면 저는 Paranoid가 아닌 Obsessive Compulsive Disorder(강박장애)라고 합니다. (그리고 J는 이를 빌미로 장난삼아 저를 O.C.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덧붙여서 J는 제 강박장애가 귀여운 수준이라고 했지만 저는 요새 증세가 점점 심해지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그나저나 제 방이 언제나 너저분한 것을 보면 강박장애와 결벽증이 따로 존재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껄껄.